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데루모토 (문단 편집) == 여담 == * 할아버지, 아버지, 형이 모두 [[술]]로 인해 일찍 죽은 모리 모토나리는 주량이 많은 젊은 데루모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데루모토의 부인을 통해 쓴소리를 했다. * 기량과 패기가 없고 성격도 우유부단한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며 시대극 등에서도 대부분 평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현재 "기밀을 곧잘 누설한다"[* 적과 내통한다는게 아니라 입이 너무 가볍다는 의미였다.] 등 조부 모토나리의 불평이 적힌 문서가 남아 있고 [[교육]]을 담당했던 작은 아버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도 엄히 예의범절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런 성격은 아버지 타카모토를 많이 닮은 것으로 보인다. * 반면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갔던 [[강항]]은 《[[간양록]]》에서 조심성이 많고 느긋하여 [[조선|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하다.고 평가하고 조선에 쳐들어간 일본군이 전과 보고를 위해 베어 보낸 조선인의 코를 바치면서도 항상 "가엾은 일이다", "이걸 차마 어떻게 손을 댄단 말인가?" 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을 보냈다는 우호적인 기사를 담고 있다. *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는 반 노부나가의 기치로 뭉친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었는데,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쫓겨 오자 단순히 정통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예우를 갖추어 섬기며 막부 멸망 후까지 개인적으로도 친밀하게 지내고 본인에게는 막부에 충의를 다하는 인물이라며 감사를 받았다. 비록 휘하 가신처럼 굴며 절대복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사후에는 제사까지 정성스럽게 챙겼을 정도로 나름 진심을 다해 대했던 듯. * 1589년 가신 스기 모토노부를 살해하고 [[네토리|그의 부인을 취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주고쿠 지방의 태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킷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두 작은 아버지가 있었던 덕택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고 [[시코쿠]], [[규슈]]에도 군사를 움직였으나 본인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다. 시코쿠, 규슈 정벌 때는 킷카와, 고바야카와의 두 작은 아버지들이 테루모토를 중심으로 도와줬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안코쿠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분열되어 죄다 따로따로 행동하는 바람에 모리 [[가문]]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군했으며 나중에는 영지가 대폭 삭감당하고 말았다. * 나가토로 이봉된 후 조슈 번의 지배체제 강화를 명목으로 가신단을 정리 [[숙청]]하였다. 혈연 관계인 구마가이 모토나오 일족[* 구마가이 모토나오, 아마노 모토노부는 하기 성 축성 도중 발생한 절도 사건으로 마스다 모토나가와 갈등을 빚어 축성이 지연되자 이로 인해 둘 다 처형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리 영지 내의 [[가톨릭]] 신앙을 뿌리뽑기 위해 가톨릭 신자였던 모토나오와 그의 사위인 모토노부를 사건 하나를 빌미로 죽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구마가이 모토나오(세례명 멜키오르)는 2008년 11월 24일에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과 요시미 히로나가[*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토벌하였다.]를 숙청하고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마스다 모토나가를 발탁하였다. 내정에 힘써 황무지 개간, 특산품을 장려하여 조슈 번의 토대를 닦았다. 번의 정치는 대부분 모리 히데모토와 마스다 모토나가에게 위임하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모리 히데모토의 조후 번은 조슈 번의 지번(支藩)이 된 것에 반해 킷카와 히로이에의 이와쿠니 번은 지번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킷카와 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 후 소홀하게 대접받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 조치는 [[양자(가족)|양자]]로 맞이했다 폐적시킨 히데모토와의 관계 유지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는 그다지 없다. 데루모토 자신은 히데모토를 모리 료센 체제에서 다카카게를 대신하는 위치로 보았고 킷카와 히로이에의 장남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집안 단속에 힘썼다. * 데루모토가 죽자 순사한 가신 나가이 모토후사는 잠시 동안 가신단에서 축출되었을 때 모리 데루모토는 은밀히 자금을 지원하였고, 다시금 가신단에 복귀하였을 때 이전과 같은 대우를 하였기 때문에 이에 감격한 나머지 주군을 따라 죽었다고 한다. * 현재에도 우둔한 무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노 미치요시 사건[* [[오사카 전투]]가 있을 무렵 모리 데루모토는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 성]]으로 보내 군자금과 병량을 지원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는 오사카 성에 입성할 때 사노 미치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전후 나이토 모토모리가 체포되어 모리 가문은 의심을 사게 되었고, 나이토 모토모리의 장남인 나이토 모토요시와 차남인 아와야 모토토요가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같은 건에서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한 공작을 보면 노회한 정치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당시 가신에게 명하여 규슈의 여러 성의 [[지도]]를 작성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증오도 드러난다.[* 오죽하면 조슈 번의 새해 첫 회의에서는 가신들이 영주에게 '막부 타도(토막)의 건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어보고, 영주가 '시기상조이다'라고 말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현 당주에 의하면 후세의 각색에 의한 창작이라고 한다.] * <[[간양록]]>의 사람 좋아보이는 서술이나 무능하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데루모토는 가신에 대해서는 숙청과 암살을 많이 한 인물이다. 그 예로는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가신이었지만 고바야카와가 죽은 후 살해당한 우가이 모토타츠 등이 있다. 단, 이는 모리 가문이 모토나리 대까지도 호족인 고쿠진의 느슨한 연맹으로 이루어져 있어 중앙집권이 충분히 진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로, 중앙집권이 진전되지 않은 다이묘 가문에서는 숙청이나 내부항쟁이 꽤 흔한 일이었으므로 데루모토가 유독 유별난 케이스는 아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강항]] 등을 비롯한 기타 유력 인사들은 숙청과는 별개로 그의 인품을 좋게 본 듯. * <[[간양록]]>에서 저자인 [[강항]]은 당시 일본 사람들이 '이에야스는 [[에도|도쿄]]에서 [[교토]]까지의 길을 모두 쌀가마니로 덮을 수 있고, 데루모토는 산요, 산인 지방에서 교토까지의 강에 모두 은전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고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